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메디 학살 (문단 편집) == 논란과 이야기들 == ||[youtube(u5X0VyAJUOo)]|| || 말메디 재판 및 사형수들에 대한 사형 영상 || 당시 영어에 능통했던 파이퍼는 영국 군가 "[[It's a Long Way to Tipperary]]"를 포로들을 향해 흥얼거렸다고 한다. 이 노래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처음 군가로 불렸다. 사건 당시에는 영미군 전체에서 유행하던 노래였다. 여기서 파이퍼의 전투단에 포로 때문에 진군에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지시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유유히 떠난 뒤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정황을 보면 파이퍼는 급한 진군을 위해 뒤에 포로를 놓아 둘 수 없었고 포로를 데리고 가면 진군 속도가 늦어질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포로를 풀어주면 경로가 발각되고 이들이 적군과 합류하여 역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또 당시 옆 마을에 있었던 아이젠하워를 잡으러 서둘렀다는 연구도 있다. 아이젠하워의 자서전에도 파이퍼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자신이 포로로 잡힐까봐 염려했다는 부분이 있다. 포로 학살에 대한 공식적인 문서는 발견된 적이 없지만 상관이었던 [[요제프 디트리히]]에게 구두로 명령을 받았을 것이란 의혹은 강하게 제기된다. 파이퍼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면 곧이어 학살된 민간인과 군인 포로의 시체가 뒤이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애초에 포로 학살 명령을 공식적으로 문서로 남겨 명령을 내리는 멍청한 군대는 많지 않다. 한 주장에 따르면 말메디에서는 탈주를 시도한 미군 포로에게 경고사격 후 조준사격이 가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을 본격적인 포로 학살로 오인한 포로들이 일제히 도주하기 시작했으며 당황한 독일군이 이를 저지하고자 도주하는 포로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다 발생한 사고로 추정되기도 한다. 참고로 탈주 포로를 사살하는 것은 국제법상 위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탈주를 시도하는 순간 포로는 포로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전투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메디 학살의 경우 대부분의 포로들은 조직적 탈주를 시도하다가 사살된 것이 아니라 '''멍하게 서 있다가 죽었다.''' 죽은 척하여 살아남은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독일군들은 '''쓰러진 포로들의 급소나 복부를 걷어차고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비명을 지르면 바로 총격을 가해 [[확인사살]]을 하였으며 킬킬거리면서 개머리판으로 죽은 시체를 짓이기며 웃고 떠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생존자들도 일관되게 갑작스럽게 발포했다고 증언했다. 시신 부검 결과 대부분 __매우 가까운 거리__에서 두부관통상을 입은 점을 보면 저항하거나 도망가다가 총에 맞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포로를 모아 놓고 갑자기 겨냥해서 죽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포로들이 저항하거나 탈주를 시도한 것은 갑작스런 발포 후에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도 소수에 그쳤다. 또 갑자기 탈주 시도가 이루어졌다면 대부분의 시체가 머리에 관통상이나 치명상을 입기는 어렵다. 무방비 상태에서 지향 사격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최종 단계에선 쓰러진 사람을 발로 차서 약간이라도 움직이면 다시 사격해서 [[끔살]]하는 [[확인사살]]이 몇 건 자행되었다. 결국 포로 학살이라고 볼 여지는 충분했다. 여기에 12월 18일부터 12월 21일에 걸친 진격로상에서 있었던 다른 학살들은 작전 중 전사한 몇몇 중대장의 독단에 의해 강행된 학살행위라는 사실이 입증됐다. 참고로 의도적인 학살은 아니었다고 해도 특별한 권한 없이 임의로 전시 국제법을 확대 해석한 일선 장교들의 약식 군사재판은 충분히 학살로 간주된다. 지휘관인 파이퍼에 대한 [[사형]] 선고가 내려진 이유는 말메디 사건 하나 때문이거나 그가 학살 명령을 내렸다는 혐의가 입증되어서가 아니다. 지휘관으로서 일련의 학살 사건 전반에 대한 지휘책임을 물은 것이다. 밑의 사람이 사고를 치면 윗사람이 책임지는 건 군대는 물론이고 전세계 거의 모든 조직의 공통점이다. 파이퍼 본인도 자신이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 점에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다만 학살 당사자였던 병사들의 상태를 감안해서 병사들의 책임은 최소한으로 물어야 한다는 취지의 이의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다만 당대 사람들은 이런 일련의 사건들, 특히 말메디에서의 첫 포로 사살 사건은 전시 국제법상 문제가 될 정도의 사건은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의외로 당시 재판관들, 심지어 검사진 중 상당수도 말메디 사건 한정으로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사형 판결이 나온 뒤에도 가해자들을 구명하기 위해 사적으로 활동하기까지 했다. 당시 파이퍼 전투단과 교전했던 미군 대대장 중 한 명은 파이퍼가 부상당한 미군을 위해 의무병을 배치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독일군에게 불리한 증언도 많았지만 유리한 증언도 꽤 나왔기 때문에 확실하게 혐의가 있다고 단정내리기 어려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